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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골살이를 꿈꾸는 청년들께 고함
글쓴이 농부이반 작성일 2019-01-31 09:29:57
시골살이를 꿈꾸는 청년들께 고함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여러분께 안부 여쭙는 이는 이십여년전 서울에서 이곳 홍성으로 삶터를 옮긴 이환의입니다. 그때가 979월이었으니까 저도 아내도 삼십대 초반으로 무엇하나 두려움이 없는 때였지요. 지금 대학 졸업반인 아이들도 다섯 살, 세 살로 한창 엄마 아빠의 손길을 필요로 할 나이였습니다.

 

그때는 귀농이란 말이 막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시점이어서 지금처럼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선배님들이 정말 귀했습니다. 제가 사는 홍동면만 해도 원천리에 사는 이기영 형님 딱 한 분이셨습니다. 그 형님만 해도 귀농학교에 강사로 온 주형로 선생님께 의지해 일년 전에 선생님댁 머슴으로 출발한 터였습니다. 선후배 동료들이 넘쳐나는(?) 지금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때문에 뒤이어 오는 후배들과의 결속력은 웬만한 형제들 이상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나하면 사정이 있어 가족이 홍성역에 밤 열시 이후에 도착해서 전화를 해서 달려나가 픽업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농사지어서 벌이도 시원찮은데 택시비로 거금을 쓰는 게 너무 아까워서였습니다. 서울에 일이 있어 갈 때도 카풀처럼 서로의 차를 얻어쓸 때도 종종 있었고, 면내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공동 작업후에나 이주 기념일외에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처럼 수시로 만나 피같은(!) 돈을 써가며 집밖에서 식사를 한다는 건 사치도 그런 사치가 없었지요.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일 겁니다. '꼭 그렇게까지 살아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 겁니다. 하지만 그 즈음의 분위기는 그랬습니다. 불과 21년전인데도 말이지요. 하기는 일간운데 제일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는 산판작업, 즉 산에서 참나무를 하루 종일 날라도 남자 일당이 5만원밖에 안했고, 여자들 밭일이 2만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초보 농부 기준으로 시간당 밭일의 생산성이 천원 가량 했으니까 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의 임금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기르던 염소를 건강원에 넘길 때도 도축비 만원이 아까워 직접 잡았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생활 곳곳에서 자연스레 확인이 되더군요. 일이 있어 서울에 갈 때도 일단 차바퀴가 구르면 돈이 들어가니까 사전에 쌀을 주문받아 배달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한 번에 열가마에서 열다섯 가마를 싣고가면 수중에 20~30만원이 떨어졌으니까 생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습니다. 또 돌아올 때는 서울에서 불필요하지만 시골에서는 필요한 것들을 한 트럭씩 싣고 왔습니다. 구체적으로 남이 신던 운동화와 구두, 냄비부터 항아리, 고무함지 등 온갖 잡동사니들. 심지어 화목으로 쓸 목재까지 빈 트럭일 때가 거의 없었네요. 차량만해도 올해 처음으로 새 차를 살 정도로 그간 계속 중고만 탔습니다. 귀농 2년차에 옆집 아주머니께서 붙여주신 별명이 '재활용의 귀재'였습니다. 정말 문자그대로 치열하게 살았던 날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야 이것보다 훨씬 더 많지만 이미 다 지난 것들이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제가 귀한 지면에 마치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흔히 하듯 '꼰대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희 부부가 이른바 기성세대 범주안에 들어와서일 겁니다.

 

특히 올해 상반기에 청년농부 인큐베이팅 코디로서 역할하며 청년들과의 갭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저도 26, 23세의 딸 둘을 둔 아빠지만 평소 아이들과는 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아이들에게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공부해라 숙제해라 소리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단어가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로 생각해 가능한 누군가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아이들도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놔두었습니다. 스무살이 넘은 이후에는 부모 자식의 관계이지만 울타리 안에 함께 사는 사람들 정도로 생각해왔습니다. 부모와 가정이 해야 할 역할은 그저 울타리, 그것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넘나들 수 있는 낮은 울타리 정도로 여깁니다. 당연히 부모랍시고 아이들의 삶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고 싶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대신에 살아오며 요즘 시대에 부족했던 부분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려한 점은 무엇보다 자립이었습니다. 때문에 중학생부터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 들어가는 돈은 전부 갚아야 할 빚임을 주지시켜왔고 실제 그대로 지켜왔습니다. 덕분에 두 딸 모두 스스로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을 선택했고 대학시절 내내 학교에서 학업과 한 두가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습니다. 방학동안에도 공공기관 연계형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모았지요. 이따금 해외여행 등으로 목돈이 들어갈 때는 돈을 꾸어주고 나중에 돌려받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아이들로부터 부모의 이런 행보에 대해 원망어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들은 저희 같은 부모와 함께 살고 싶으세요? 추측컨대 아마도 아닐 겁니다. 내힘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는 삶이 더 힘들고, 때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희 부부는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길이 우리 앞에 있지만 저희의 선택은 이것입니다. 대신에 아이들을 위해 몇 년전부터 저축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각자 부모의 둥지를 완전히 떠나 새로운 둥지를 만들때 약간의 재료 구입비 정도는 필요할 것 같기에 두 아이에게 똑같이 나누려합니다.

 

언젠가 저희 큰 아이가 그러더군요. "엄마,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친구들보다 공부하는 시간이 훨씬 적은 데도 성적은 걔들보다 잘 나와. 뭐 시간이 많다고 잘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초등학교 대부터 대학까지 성적에 대해 뭐라 해본적도 없지만 이 말의 의미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저희 아이들은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자신들이 서 있는 지점을 적확(的確)히 파악하고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들을 해가는 겁니다.

 

때문에 삼십만원짜리가 아니라 삼천원짜리 중고 옷으로도 만족할뿐더러 신상(新商)보다 더 맵시나게 꾸밀줄도 압니다. 큰 아이는 해외여행을 좋아해서 벌써 십여개국 가까이 다녀왔고, 일본에서는 일년 가까이 머물며 알바를 한꺼번에 두 세 가지를 할 정도였습니다. 취업도 한국에서 어려우면 바로 외국으로 뛰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뭐해먹고 살까 걱정한 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농촌이 어렵고 농업이 힘들다 합니다. 저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하지만 농사 첫해부터 손해를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무언가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패배주의에 빠진 것 같아 안타까운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이 갈수록 푸른 희망을 잃어가는 듯 보여 선배로서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간 저희 부부처럼, 혹은 저희 아이들처럼 지금 현재, 이곳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현실과 속된 말로 박터지게 부딪쳐본 경험이 있는지요?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라 적어도 십년 이상 지속해 볼 막연한 계획이라도 품어본 때가 있는지요?

 

제가 농부로 변신한 뒤 첫 일년간은 하루 일을 마치고 걸음이 잘 걸어지면 불만, 발걸음을 내딛기가 조금 어려우면 만족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지 않았구나' 하는 일종의 자가진단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오늘 하루는 어떠셨는지요? 혹시라도 오늘 저녁 6시경에 삼십미터쯤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며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떼어보십시오. 그 사이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 맞이할 것들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이 일을 십년쯤 지속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드릴 말씀은 많지만 귀농 첫해에 아내의 걱정을 끝으로 글을 맺겠습니다. 그때 아내가 때때로 그러더군요. "여보, 제발 좀 살살해. 그러다 당신 죽어. 나 과부 만들거야?"

 

ㅎㅎ 여러분, 저는 아내의 우려와는 달리 아직도 죽지 않았고 멀쩡히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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